[스크랩] 앵두 / 고영민 앵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 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 좋은시 2012.04.19
[스크랩] 폐점(閉店) / 박주택 폐점(閉店) 박주택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 등에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좋은시 2012.04.16
[스크랩] `아줌마`라는 말은 / 김영남 '아줌마'라는 말은 김 영 남 일단 무겁고 뚱뚱하게 들린다. 아무 옷이나 색깔에도 잘 어울리고 치마에 밥풀이 묻어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은 낯설어하지만 골목에서 아이들이 '아줌마'하고 부르면 낯익은 얼굴이 뒤돌아본다. 그런 얼굴들이 매일매일 시장, 식당, 미장원.. 좋은시 2012.04.09
[스크랩] 벼루 / 마경덕 벼루 마경덕 뚜껑을 잃어버린 낡은 벼루 우묵한 가슴 하나만 남았다 족제비와 숫염소가 수없이 드나든 저 연지(硯池) 먹과 붓이 머리를 비비며 조금씩 덜어낸 벼루의 가슴이 앙상하다 열흘이 넘도록 마르지 않고 먹을 갈아도 흔들리지 않던 무게는 묵즙을 토해내며 점점 가벼워졌다 몇 .. 좋은시 2012.03.02
[스크랩] 구름의 타자기 / 손택수 구름의 타자기 손택수 마라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구름이다 구름은 지치는 법이 없다 고물상 한쪽 녹슨 마라톤타자기, 비구름이 낡은 소파에 앉아 원고를 쓰고 있다 무슨 마감이라도 임박했는지 타닥탁탁 자판 두드리는 소리 끊어지지 않는다 자판 위에서 튕겨오르는 빗줄기, 희미하.. 좋은시 2012.03.02
[스크랩]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박형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박형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솟아오르는 우리의 정오(正午)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 좋은시 2012.03.02
[스크랩] 사함석(蛇含石) (외2편) / 박형권 사함석蛇含石 (외2편) 박형권 뱀 한 마리가 먹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입을 흙으로 봉합하고 속을 비울 때 흙에 고이는 독은 이슬만큼 맑으리 사람도 누군가를 위하여 겨울잠을 잔다면 잠결에 적어둔 편지가 꽃 좋은 사월에는 화사한 고백이 되리 저 야트막한 언덕에 댑싸리 꽃대궁이로 엮은.. 좋은시 2012.02.26
[스크랩] 맹꽁이 울음소리 / 송진권 맹꽁이 울음소리 송진권 소란스레 후두둑 막 퍼붓다가 들이붓다가 흙탕물 이뤄 떠난 것들을 따라가지 못한 물방울들이 칭얼대며 머위 잎이나 오동나무 새순에 엉긴 밤이구요 똑똑 물방울 듣는 소리 사이사이로 듣는 저 소린 분명 맹꽁이 울음소리인데요 황소가 영각을 쓰며 벽을.. 좋은시 2012.02.05
[스크랩] 바코드 / 허영숙 바코드 허영숙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A4 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써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흔 해의 이력을 A4 용지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책상 한 쪽 구석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는 먹다.. 좋은시 2012.02.05
[스크랩] 자작나무 여자 / 최창균 자작나무 여자 최창균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좋은시 201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