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함석蛇含石 (외2편)
박형권
뱀 한 마리가 먹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입을 흙으로 봉합하고
속을 비울 때
흙에 고이는 독은 이슬만큼 맑으리
사람도 누군가를 위하여
겨울잠을 잔다면
잠결에 적어둔 편지가 꽃 좋은 사월에는
화사한 고백이 되리
저 야트막한 언덕에
댑싸리 꽃대궁이로 엮은 집에서
내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내 팔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처마 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식구들의 냄새와 얼크러져
마을의 체온과도 얼크러져,
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복숭아나무에서 꽃잎이 나부낄 때
나는 흙을 문 살모사처럼 묵언으로 독을 골라
치사량 높은
시 한 줄 받아내리
-------------------------------------------------------------
흙의 이민
고사리는 산에서 밭으로 옮겨 심으면
십 년 지나야 새순을 낸다
마흔여덟에 일흔을 바라보는 어머니 똥구멍을 물고
산밭에 따라갔다가 들은 말이다
어머니 손 안 간 흙이 없고 풀 없어서
손님처럼 서 있다가
‘적응하느라 그렇겠지요’ 한마디 뱉은 것이 실수였다
아이다
옛날 흙을 몬 닞어서 그런 기다
잊는다?
삼 년 전 그 흙이 고사리를 놓지 못하고
자기 살점 묻혀 떠나보낸 것
산 흙이 밭 흙과 만나 교통할 때까지 밭 흙에게 어색했던 일
반쯤이나 잊는 데 삼 년 걸린단다
집안의 형님 일가족이 미국 이민을 갈 때
고향 흙 한 줌 담아 갔다고 한다
유리병에 담긴 그 흙은 형의 후손에게 내력으로 남겠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형벌에 갇힌 것이나 아닐까
어떨 때는
사람보다 흙이 더 아플 때가 있다
---------------------------------------------------------------
우두커니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 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싸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
박형권 / 1961년 부산 출생.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우두커니』.
'좋은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구름의 타자기 / 손택수 (0) | 2012.03.02 |
---|---|
[스크랩]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박형권 (0) | 2012.03.02 |
[스크랩] 맹꽁이 울음소리 / 송진권 (0) | 2012.02.05 |
[스크랩] 바코드 / 허영숙 (0) | 2012.02.05 |
[스크랩] 자작나무 여자 / 최창균 (0) | 2012.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