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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함석(蛇含石) (외2편) / 박형권

풍경소리(양동진) 2012. 2. 26. 20:28

사함석蛇含石 (외2편)

   박형권

 

 

 

뱀 한 마리가 먹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입을 흙으로 봉합하고

속을 비울 때

흙에 고이는 독은 이슬만큼 맑으리

사람도 누군가를 위하여

겨울잠을 잔다면

잠결에 적어둔 편지가 꽃 좋은 사월에는

화사한 고백이 되리

저 야트막한 언덕에

댑싸리 꽃대궁이로 엮은 집에서

내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내 팔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처마 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식구들의 냄새와 얼크러져

마을의 체온과도 얼크러져,

청마루에서 내다보이는 복숭아나무에서 꽃잎이 나부낄 때

나는 흙을 문 살모사처럼 묵언으로 독을 골라

치사량 높은

시 한 줄 받아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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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이민

 

 

 

고사리는 산에서 밭으로 옮겨 심으면

십 년 지나야 새순을 낸다

마흔여덟에 일흔을 바라보는 어머니 똥구멍을 물고

산밭에 따라갔다가 들은 말이다

어머니 손 안 간 흙이 없고 풀 없어서

손님처럼 서 있다가

‘적응하느라 그렇겠지요’ 한마디 뱉은 것이 실수였다

아이다

옛날 흙을 몬 닞어서 그런 기다

잊는다?

삼 년 전 그 흙이 고사리를 놓지 못하고

자기 살점 묻혀 떠나보낸 것

산 흙이 밭 흙과 만나 교통할 때까지 밭 흙에게 어색했던 일

반쯤이나 잊는 데 삼 년 걸린단다

집안의 형님 일가족이 미국 이민을 갈 때

고향 흙 한 줌 담아 갔다고 한다

유리병에 담긴 그 흙은 형의 후손에게 내력으로 남겠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형벌에 갇힌 것이나 아닐까

어떨 때는

사람보다 흙이 더 아플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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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 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싸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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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 1961년 부산 출생.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우두커니』.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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