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 정채봉 시인 (시모음)

풍경소리(양동진) 2011. 8. 30. 07:04

* 

 

 

 

 

 

 

가시

 

   

장미나무에

 

숯불덩이 같은 꽃이 얹히는

 

아카시나무에

 

팝콘 같은 꽃이 확 퍼져 있는

 

찔레나무에

 

아기 손톱 같은 꽃이 앙증스럽게 손짓하는

 

오월

 

 

나의 나무는

 

꽃은 없고

 

가시만 돋아

 

 

 

 

 

 

그땐 왜 몰랐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나무의 말

 

   

소녀가 나무에게 물었다

 

"사랑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들려다오'

 

 

나무가 말했다

 

"꽃 피는 봄을 보았겠지?"

 

"그럼"

 

 

잎 지는 가을도 보았겠지?"

 

"그럼"

 

 

"나목으로 기도하는 겨울도 보았겠지?"

 

"그럼"

 

 

나무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나의 대답도 끝났다"

 

 

 

 

 

내 마음의 고삐

 

 

내 마음은

나한테 없을 때가 많다.

거기 가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데도 어느새

거기 가 있곤 한다.

 

거기는 때로

고향이기도 하고,

쇼무대이기도 하고

열차 속이기도 하고,

침대 위이기도 하다.

 

한때는

눈이 큰 가수한테로

달아나는 내 마음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아침이슬에 반해서

챙겨오기가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저녁노을,

겨울바다로 도망간 마음을

수습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이제

내 마음은

완전히 너한테 가 있다.

네 눈이 머무는 곳마다에

내 마음 또한 뒤지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인 것이다.

 

네가 자갈길을 걸으면

내 마음도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때가 많을 것이다.

네가 가시밭에 머물면

내 마음도 가시밭에서

방황할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서도

푸른 초원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

 

너는

내 마음의 고삐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눈 오는 한낮

 

 

  그립지 않다

너 보고 싶지 않다

마음 다지면 다질수록

고개 젓는 저 눈발들...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만남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보 

 

잠든 아기를 들여다본다

 

아기가 자꾸 혼자 웃는다

 

나도 그만 아기 곁에 누워 혼자 웃어 본다

 

웃음이 나지 않는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웃음이 나지 않는다 

 

 

 

 

 

 

 

사랑 

 

 

사랑하는가?

 

 

눈물의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슬픈 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 

 

 

 

 

 

새 나이 한 살 

 

한 살

 

새 나이 한 살을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

 

 

썩어 문드러진 헌 살 헌 뼈에서

 

그래도 남은 힘이 있어

 

올라온 귀한 새싹

 

 

어디 몸뿐이랴

 

시궁창 같은 마음 또한 확 엎어 버리고

 

댓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받아

 

 

 

 

 

 

새로이 한 살로 살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그 나이 이제

 

한 살 

 

 

 

 

 

 

생명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세상사 

 

 

울지 마

 

울지 마

 

 

이 세상에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거야

 

 

울지 말라니까! 

 

 

 

 

 

수건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잠은 오지 않고

 

방 안은 건조해서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밤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저 하잘것없는 수건조차

 

자기 자신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수도원에서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지울수 없는말

 

마술사로 부터 신기한 지우개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이 지우개로는 어떠한 것도 다 지울 수 있다. 딱 한가지만 빼고는."

그는 지우개를 가지고 신문을 지워 보았다

 

세계의 높은 사람들 얼굴을

그리고 말씀을

그러자 보라 정말 말끔히 지워지고 없지않은가

그는 신이 났다

그림책도 지우고

사진첩도 지웠다

시도 지우고

소설도 지웠다

 

그는 아예 사전을 지워버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다른 것은 다 지워지는데

한 단어만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문지르고 문지르다

마침내 지우개가 다 닳아지고 말았다

그와 그 지우개가

끝내 지우지 못한 단어는 이것이다

 

"사랑"  

 

 

 

 

 

통곡 

 

죽음을 막아서는

 

안타까운 절규

 

"안 돼!"

 

온몸을 던져서 막아서는

 

여인

 

그러나 죽음은

 

그 어떤 사정도

 

명령도 듣지 않고

 

무표정히

 

갈 길을 간다

 

 

 

 

 

 

하늘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진리도 낮은 데로 흐른다

 

하늘이 높은 데 걸린 것은

 

최고의 낮은 터이기 때문

 

 

 

 

 

면  회  사  절    
                       
오지마라

오지마라

오지마라

내 이대로 너를  사모하게 하라


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나의 수의는  너의 사랑  한 벌이면 된다

아직은 절망하기 싫다

아직은 소유하고 싶다


면회사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꿈길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지 마라

나는 지금  너에게로 가는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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