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외 4편)
장요원
그녀의 커다란 눈을 멀리서 들여다 본다
고요가 출렁임을 꾹 누르고 있다 가라앉히지도 엎지르지도 못한 마음들이 水皮처럼 일어, 고여 있는 듯 같은 자리를 부유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종족은 품는 습성이 있다지
이미 떠나버린 철새들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지난밤 달이 부려놓은 시름을 토닥거린다
어쩌면 그녀의 온몸은 태胎인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발끝을 세우고 빙글빙글 돌자 어지러운 듯 울컥거린다
꼬리 긴 바람이 마법을 걸어 파동을 일으킨다
수만 번 제 숨을 조였다가 푸는
물의 태동,
오랜 시간 자신의 씨앗을 품지 못한 그녀의 태동은
이 계절을 분만하고 나서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서쪽 하늘에 걸린 생리혈이 그녀의 눈망울로 번지고 있다
춤
바람의 손끝에 춤이 묶여 있다
몸을 벗어버리자
바람들이 옷으로 들어온다
옷이 한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을 한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춤을 춘다
바람이 손끝으로 줄을 밀고당기는 동안
빨래집게가 햇볕을 꽉 물고 있다
날아가지도 못하는 공중에 관절들이 가득 들어있다
셔츠를 입은 바람이 줄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안간힘을 쓰며 놓지 않는 햇볕의 어금니,놓아달라는 듯 늘어진 팔이 줄을 후린다
미니스커트 속으로 바람이 든다
점점 팽팽해지는 바람의 근육,
수백 마장 바람의 층에 동작들이 접혀 있고
한 호흡 한 호흡, 넘어갈 때마다 물기들이 퇴장한다
눅눅한 관절이 경쾌해진다
바닥에 매달린 춤이 다 마를 때까지
다행히 오후는 햇볕을 끄지 않았고
공중은 매여 있어
몸을 비워낸 춤들이 반듯하게 개켜지는 저녁,
빨래집게들만 캄캄하게 남아 밤새 어둠을 말릴 것이다
풀리고 있는 오전
검은 실뭉치가 마당 한쪽에서 풀리고 있다
조용히 접혀 있는 작은 새의 비행 궤적을
개미 떼가 풀어내고 있다
오전을 다 왕복해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
새의 몸에서 냄새가 길게 풀어진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진다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새는 허공에서 풀어지는 평생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
궤적의 길이, 그 마지막 끝에 내려앉았는지도 모르는 일
몸을 부풀린 바람이 다녀간다
바람의 혀에
팽팽해지는 검은 실뭉치
허공엔 하현달이 날아간다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나 마지막으로 버렸을 비틀거림은 지상에서 배운 것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고
몸은 공기라는 관棺에 들어있다
먼저 떨어진 나무 그늘 위로 붉은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다
잎들이 날아간 빈 가지 아래
개미 떼가 다 풀어간 실패 같은
뼈들만 얽혀 있다
새의 몸에서 검은 실이 길게 풀려나오고 있다
아니, 오전의 햇볕 한 줄기가
처마 밑 어둠 속으로 오래 감겨 들어간다
말뚝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애기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피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나무의 귀
가지마다 붙어 있던 소리들을
나선의 밑동으로 밀어넣고
새들이 푸른 귀를 찾아 날아갔다
펄럭이던 그늘보자기가
떨어진 나무의 소리를 다 싸서 가고
가끔 햇볕의 뼈대만 흔들리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이 머플러처럼 나뭇가지를 감고,
아직 남은 몇 장의 귀가
은색의 소란을 듣고 있다
이파리들의 소임은 나무의 귀,
햇볕의 등에 그늘을 붙였다 떼는 일
바람의 행선을 알리는 일
엽록의 달팽이관에 새들의 졸음을 재워주기도 한다
은밀한 파동이 들어있는
몇 칸의 서랍이 만들어지고 있을 오동나무
햇빛 두어 채 개켜두거나 혹은,
새들의 사서함이거나 노숙하는 구름이 묵어 갈 서랍들
따뜻하라고,
은색의 비닐머플러가 감겨져 있다
늙은 오동나무는 늙은 바람의 목덜미이다
무거운 귀를 툭툭 흘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몇 칸 서랍이지만
봄이 오면
푸른 귀들이 빼곡, 차오를 것이다
당선소감
몸은 가라앉고 마음은 부풀어 오른다
이 저녁이 팽창하여 터질 것만 같다
음악을 듣다가 하마터면 휴대폰 신호음을 놓칠 뻔했다 정진규 선생님께서 친히 축하 전화를 주
셨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아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난다
이 기쁨의 소요를 수습할 수 있는 게 고작 눈물이라니......
시 쓰는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늦은 문우들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양분이 되
어준 시집들에게, 시시때때로 덜미를 잡혀준 바람, 허공의 동공들, 내가 훼손한 그림자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가끔 피아노 건반을 짚으면서 시를 쓰는 일이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
다 건반은 팔십팔 개나 되는 손가락이다 수많은 가슴이다 아마도 가슴이라는 도구로 빚는, 같은
질감 때문일 것이다
가을에 들어설 때마다 재즈음악을 자주 듣게 된다 아니, 요즘엔 구조나 형식에서 탈선하는 재즈
(jazz),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이 적확할 것이다 다소 안정적이라는 내 시에 바퀴를 달고 싶은 욕
망일 수도 있겠다
바퀴 달린 詩를 꿈꾼다
미흡한 시를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현대시학』이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시인이 되겠노라 마음을 다지지만 걱정이 앞서는 저녁이다.
* 장요원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201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ㅡ《현대시학》 2011,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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