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
출생 : 1922년 11월 25일 ~ 2004년 11월 29일 · 학력 : 경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 · 직업 : 시인 · 약력 : 1948년 첫시집 '구름과 薔薇' 간행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 대표작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꽃을 위한 서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시 1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했던 부분을 말하라. 베고니아의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 울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 습기와 한강변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가을 저녁에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능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분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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