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 박재삼 시인 ( 시모음 )

풍경소리(양동진) 2011. 8. 30. 06:50

                        박재삼 

1933 일본 동경 출생
고려대 중퇴
1953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 추천
1955 <<현대문학>>에 시 <정적>과 <섭리>로 추천 완료
1956 제2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997년 작고
25여년 간 바둑 관전평을 집필, 박 국수(國手)로 잘 알려져 있음
시집 <가을바다>, <슬픔과 허무의 바다>
수필집 <시쓰듯 연애하듯> 등 다수

박재삼 시인 ( 시모음 )

 

미루나무


미루나무에

강물처럼 감기는
햇빛과 바람
돌면서 빛나면서
이슬방울 튕기면서
은방울 굴리면서.
 
사랑이여 어쩔래,
그대 대하는 내 눈이
눈물 괴면서 혼이 나가면서

아, 머리 풀면서, 저승 가면서.

 

 

 

 

자연 ( 自然 )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 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 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 낼런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 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 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가을비

 

 

가을 아득한 들판을 바라보며

시방 추적추적 비 내리는 광경을

꼼짝없이 하염없이 또 덧없이

받아들이네.

이러구러 사람은 늙는 것인가.
 

세상에는 볕이 내리던 때도 많았고

그것도 노곤하게 흐르는 봄볕이었다가

여름날의 뜨거운 뙤약볕이었다가

하늘이 높은 서늘한 가을 날씨로까지

이어져 오던 것이

오늘은 어느덧 가슴에 스미듯이

옥타브도 낮게 흐르네.


어찌보면 풀벌레 울음은

땅에 제일 가깝게

가장 절절이

슬픔을 먼저 읊조리고 가는 것 같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까나.

아, 그것이 막막한

빈 가을 빈 들판에 비 내리네.


 

 

 

사랑하는 사람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나무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

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가는 근심,

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

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풀잎의 노래

 


천지에 파랗게 풀잎들이 솟아

무슨 간절한 할말이라도 있는 듯

조용한 아우성을 지른다

네, 네, 네, 야단스러이

일제히 소리하며 일어나고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환호를 치며 솟아오른다


아,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시끄러운 말을 피하고

오직 바람 속에서 햇빛 속에서

몸을 통째로 내맡기고 있나니

파란 것이 어떻게

빛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것은 어릴 때부터 느껴온 수수께끼였어라.


그리하여 그들은 드디어

바람에 흐르고

햇빛에 젖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해내면서도

그것을 다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묵묵한 가운데 치르는구나.

 

 

 추억( 追憶 )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비오는 날

 


가슴을 다친 누이는

 

오지 못할 사람의 편지를 받고

 

다시 한 번

 

송두리째 가슴이 찢긴다

 

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물

 

땅에서도 괴는 눈물의

 

이 비오는 날!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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