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인 ( 시모음 )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못 위의 잠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 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뜨거운 돌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빈 의자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너무 많이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흐린 날에는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가라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정도리에서
모난 돌은 하나도 없더라 정 맞은 마음들만 더는 무디어질 것도 없는 마음들만 등과 등을 대고 누워 솨르르 솨르르 파도에 쓸리어가면서 더 깊은 바닥으로 잠기는 자갈들 그렇게도 둥글게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안개는 출렁거리지 않고도 말한다.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조각배는 뭍에 매어져 달아나지 못한다. 묶인 발을 견디며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타오르지도 녹아 흐르지도 않는 안개 너머로 막막한 어둠의 등이 보이고 종일 돌팔매질이나 하다 돌아가는 내가 거기 보이고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땅 끝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나 서른이 되면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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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못 위의 잠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 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뜨거운 돌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빈 의자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너무 많이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흐린 날에는
너무 맑은 날 속으로만 걸어왔던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여 썩기도 전에 이 악취는 어디서 오는지, 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지 않고는 좀더 가벼워지지 않고는 그 습한 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바람은 칼날처럼 깊숙이, 꽂힐 때보다 빠져나갈 때 고통은 느껴졌다. 나뭇잎들은 떨어져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뒤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구름장 터진 사이로 잠시 드는 햇살 그러나, 아, 나는 눈부셔 바라볼 수 없다.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나부끼다 못해 서로 뒤엉켜 찢겨지고 있는 저 잎새의 날들을 넘어야 한다.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내가 기대어 살아온 것은 정작 허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채우면 이내 사라지는, 허나 다시 배고픈 영혼이 되어 무언가를 불러대던 소리, 눈빛, 몸짓, 저 냄새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런 지푸라기에 붙인 불꽃이었을까 그러나 허기가 아니었다면 한 눈빛 어떤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한 손이 다른 손을 잡을 수는 있었을까 허기로 견디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갈밭 같은 시대 거기 메아리를 얻지 못한 소리들만 가라앉아 뜨겁게 자갈을 달구는 시대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덤불 있다면 그 앞에 신이라도 벗어야겠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그리로 그리로 기울고 싶다 정도리에서
모난 돌은 하나도 없더라 정 맞은 마음들만 더는 무디어질 것도 없는 마음들만 등과 등을 대고 누워 솨르르 솨르르 파도에 쓸리어가면서 더 깊은 바닥으로 잠기는 자갈들 그렇게도 둥글게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안개는 출렁거리지 않고도 말한다.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조각배는 뭍에 매어져 달아나지 못한다. 묶인 발을 견디며 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타오르지도 녹아 흐르지도 않는 안개 너머로 막막한 어둠의 등이 보이고 종일 돌팔매질이나 하다 돌아가는 내가 거기 보이고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땅 끝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나 서른이 되면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려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도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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