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게으름 연습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 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의 식솔들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 대신 가끔 가야금이든 바이올린이든 함께 듣기로 했다.
가을 맑은 날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미소 사이로
벚꽃 지다
슬픈 돌 부처님 모스라진 미소 사이로
누가 꽃잎이 눈처럼 날린다 지껄이느냐
누가 이것이 마지막이다 영생토록 마지막이다 울먹이느냐
너무 오래 쥐고 있어 팔이 아픈 아이가 풍선 줄을 놓아버리듯
나뭇가지가 힘겹게 잡고있던 꽃잎을 그만 바람결에 주어버리다.
가슴이 콱 막힐 때
가슴이 콱 막힐 때 있습니다. 답답해서 숨을 못 쉴 것만 같은 때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당신이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탓으로 섭니다. 그렇게는 살지 못하지요. 잠시만 당신을 마음 밖으로 나가 살게 할까 합니다.
소나무, 버즘나무, 오동나무, 줄지어 선 뜨락의 한 구석, 당신을 한 그루 감나 무로 세워 두려고 그럽니다. 매미 소리 햇빛처럼 따갑게 쏟아지는 한여름을 그렇 게 벌 받고 서 계신다면 분명 당신의 가지에 열린 감 알들도 조금씩 가슴이 자 라서 안으로 단물이 들어가겠지요.
어렵사리 우리의 첫 번째 가을이 찾아오는 날, 우리는 붉게 익은 감 알들을 올려보며 감나무 아래에 오래도록 서 있어도 좋겠습니다. 서로의 가슴속에 붉고 탐스럽게 익은 감 알들을 훔쳐보며 어린아이들처럼 철없는 웃음을 입술 가득 베어 물어도 좋을 것입니다.
멀리까지 보이는 날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 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기쁨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눈부신 세상
멀리서 보면 때로 세상은 조그맣고 사랑스럽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다가 깨어난 아이처럼 세상은 배시시 눈을 뜨고 나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다
세상도 눈이 부신가 보다.
뒷모습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국.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산촌 엽서
고개 고개 넘으면 청산
청산 봉우리에 두둥실 향기론 구름
또닥또닥 굴피너와집에 칼도마 소리
볼이 붉은 그 아이 산처녀 그 아이
산제비꽃 옆 산제비꽃 되어 사네
산벚꽃 옆 산벚꽃 되어 늙네.
서울, 하이에나
결코 사냥하지 않는다
먹다 남은 고기를 훔치고 썩은 고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고기를 훔치는 발톱이 고독을 안다 하겠는가 썩은 고기를 찢는 이빨이 슬픔을 어찌 안다고 말하겠는가
딸아, 사냥하기 싫거든 차라리 서울서 굶다가 죽어라.
수선화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뽀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어머니 치고계신 행주 치마는
어머니 치고 계신 행주치마는 하루 한 신들 마를 새 없이, 눈물에 한숨에 집뒤란 솔밭에 소리만치나 속절없이 속절없이…….
봄 하루 허기진 보리밭 냄새와 쑥죽먹고 짜는 남의 집 삯베의 짓가루 냄새와 그 비린내까지가 마를 줄 몰라, 마를 줄 몰라.
대구로 시집간 딸의 얼굴이 서울서 실연하고 돌아와 울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박혀 눈에 가시처럼 박혀 남아 있는 채, 남아 있는 채로…….
이만큼 살았으면 기찬 일 아픈 일은 없으리라고 말하시는 어머니, 당신은 오늘 울고 계시네요 어쩌면 그렇게 웃고 계시네요.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깨닫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어쩌다 이렇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삶이란 정말로 어쩌다 이 지경 으로 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한이 되어 텅빈 가슴속 더 이상 보여줄것도 없는 시린 모습들
질리고 질려서 내 버려두면 좋을까?
자신의 삶에 더 많이 충실하게 무게를 실어주자........
선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 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셔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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