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시

시 쓰는 남자 / 박소란

풍경소리(양동진) 2011. 11. 21. 11:43

시 쓰는 남자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이명(耳鳴)  



                                      박 소 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 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개심사 애기똥풀



                             황 인 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문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진달래가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해우소는 천 길이나 깊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요동치는 배를 잡고 허리띠를 풀며 뛰어 들어갔지만 이런 낭패가 있나, 깊이가 몇 길은 되어 보이는데 얼기설기 판자로 바닥만 엮어 놓고 군데군데 구멍만 뚫어 놓았지 칸막이가 없다. 엉거주춤 볼일 보던 사람, 앉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오줌을 누는 사람들의 시선이 참 어정쩡하다. 몇몇의 눈길이 동지애를 느끼며 같은 자세를 취하길 원하였지만 안사부인 볼일 보는 화장실을 열어본 것처럼 놀라 아랫배를 내밀고 엉덩이에 댄 두 손에 힘을 주고 나왔다.
천 년 전 처음 이곳에 볼일을 본 스님은 자꾸 다시 들어오라 하는 것 같은데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 하나로 하늘도, 가냘픈 애기똥에 기댄 마음도 옷을 벗지 못한다.
개심사를 감싸고 있는 상왕산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옆 칸에서 나오다 눈길 마주친 젊은 비구니의 얼굴엔 진달래 산불이 다시 옮아 붙고 있다.






                    신원불명

 


                                     손 유 미



그 밤,
숨겨둔 생선가시를
내 손 끝에 박으며 노래를 불렀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
서로의 몸을 열었다가 잠그고
너도 잃어버렸니
저 벽이 삼켰을지도 몰라
두리번거리는 손가락
벽은 두드릴수록 굳게 닫혔네
얼굴 없는 사람들이 흘러내리는 공간
질척한 바닥에 비늘이 박히는데
나는 손톱을 남겼네
검은 바다, 속삭이는 가시만
파랗게 솟아
침묵하는 밤의 뼈가 되었네

기억에 화석화 된 밤



마지막 증인
- 사건 번호 제 860323호



사건은 당신이 실종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방에 들어온 발자국은 당신이 옷에 걸려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림자가 달아났어

그림자는 지하실에서 가위로 잘린 채 발견되었다 발자국은 형광등에서 상처의 딱지처럼
죽어있는 벌레들을 수거했다
유족들은 증거자료로 시체를 해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해부된 시체는 범인의 증거인멸을 우려해 화장되었다
발자국은 처음부터 다시 수사를 시작했고
당신의 실종을 확인했다 아무도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발자국은 당신의 집으
로 돌아왔다
당신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범인에게 납치되었다 발자국은 바닥에 남은 발자국에서 범인이 남긴 글자를 봤다

나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발자국은 달아났다 얼굴이 없는

발자국들은 당신이 발자국은 납치했다고 의심했다




비상구 



1

지하철 문이 열린다
들어오는 발보다 나가는 발이 가볍다 본능적으로
몸을 밀고 태어나서
밀려서 사라짐을 생각한다
내가 더해지는 순간, 어느 한 곳에서
빼기가 되는 이들이 있다 마주보는
발들이 한 계단에서 원점이 되었다가 나뉜다


2

신, 발을 신다와 벗다의 차이
사람들은 신발에서 더하기를 찾는다
내가 까마득하게 누워 있는 옆에서
조문객들이 숟가락을 물고 있다 입 속에
뺄셈의 시간과 덧셈의 계획들 한 움큼
소유와 계산은 빨리 알수록 좋다
다른 이의 빈자리에 내가 앉게 되는 시간
그 지속성에 대해, 때론
공급이 수요를 넘어도 내 것이 없음을 아는 것
내 몫을 쥐어가는 손들
효율은
분배 된 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가치가 있다


3

지하철 문이 닫힌다
미처 타지 못한 발 뒤로
달아나듯 계단을 오르는 발이 있다
발들은 계산을 하는 중이다
더하기를 셈하는 이들이
빼기의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어느 한 곳이 비어 있지는 않다 적확히
원점을 채우며 걷는 발들 사이,
비어 있는 시간의 틈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지하철이 다시 터널로 들어가고 까맣게
입들이 더하기를 우물대며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실종


거미는
집을 나가지 않는다
흔들리는 집에 매달린 검은
남자의 얼굴, 빈 집에
껍데기처럼 놓인

거미가
사라졌다 남자는
길을 헤매고 있다
지친 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심장 소리가 머리를 뛰게 한다
부풀어 오르는 검은 얼굴

터질 것 같아
남자는 중얼대고 가슴을
움켜쥔다 가늘고 긴 손이,
바스락대는 숨이
땅을 파고 든다

남자의
생이

미치는 영향보다 큰
마디마디 몸이
사람들의 발끝에 남았다



벽화 - 유리 앞에서


투명한
그림자가 벽에 걸렸다
표면장력에 빠진 숨, 일그러진
도플갱어*가 나를 따라 온다
끼익 ―
길을 따라 달리는 차가 내 몸을
붉게 관통 한다
움직이지 않는 혀
위에 손톱이 깨진다
톡,
톡 무미한 입김을 씹었다
색이 길을 적시며 흘러가도
나는 흑백의 잔영으로 머물러 있다
달리는 사람들이 가진 이탈의 두려움
멈춰선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복 된다
바로 잡아야
말이 되는 사람의 표식
뒤집힌 혀가
내 몸을 벗어나 유리에 박혔다
하나의 하나가 파드득
물고기를 삼킨다
세파(細波) 이는 그림자의 입술

*도플갱어: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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