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인식과 시적 형식의 대응구조 / 류철균
1. 들어가는 말 : 황지우 시의 총체적 이해를 위해 ----
시인이란 삶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끝없는 부정(否定)의 정신으로 다양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어떤 객관적인 논리로 삶에 대한 해답이 내려질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시인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가깝게는 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멀리는 그 시대, 그 사회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기 시인은 이미 규정지워진 모든 정의들을 회의하고 비판하며 그 고정관념의 카테고리 밖에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이런 소수의 질문자가 존재할 때 그곳은 보다 새롭고 바람직한 비젼을 간직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시인의 시를 비평하면서 그가 제기하는 질문들이 그야말로 원론적이라고 얘기되는 막연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지금'의 삶 속에서 '이곳'의 이웃들에게 던져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한국문학은 어떤 질문자를 갖고 있을까? 특히 시에 있어서 누가 가장 첨예하고 불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이런 문제에 접했을 때 우리는 80년대의 문단에서 갖는 황지우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황지우는 우리의 시에 커다란 새로움(newness)을 던져주었다. 그 새로움이 어떤 진정성을 띠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가는 뒤에서 논의될 문제지만 소설적 요소의 도입, 신문기사나 계시문의 생경한 인용, 도표나 컷의 삽입 등 그의 극단적인 형식파괴는 기존의 시개념에 중요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다.
또 30년대의 이상이나 <3.4문학>동인들의 전례처럼 시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이같은 도전은 황지우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황지우를 읽는 우리는 그의 질문이 여기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시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방법론적 새로움은 현실에 대한 첨예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을 때 기존의 체제가 은연중에 조장하는 비현실적 무관심을 도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황지우는 이렇나 위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그의 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시가 가진 방법론적 새로움과 함께 그런 새로움들이 드러내는 시인의 현실인식에 착목해야 할 것이다.
문학작품이 단순히 방법론적인 형식과 그것이 표현하는 내용으로 이분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한, 시인의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사이에는 상당한 대응관계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80년대의 삶 속에서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이 얼마만큼 필연적 의미망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의 방법론적 새로움이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가 현실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 어떤 인식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의 드러냄이 현실에 대해 어떤 대응구조를 가지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황지우의 현실인식을 낳게 한 80년대 상황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에 대응하는 시의 진정성에 관한 시인의 관점을 밝히는 데서 이 논의를 출발시켜 나가겠다. 논의의 성격상 그의 시 하나하나에 대한 정치한 분석보다는 현실의 상황과 시적 형식간의 대응관계를 추출하는데 주력하게 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2. '80'년대의 상황과 시의 진정성.---------
황지우의 시를 읽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10.26 이후 노도처럼 솟아 올랐던 민주화의 열기와 민족의 향방에 관한 활발한 정치적 토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5월 이후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포된 정치적 무관심과 허무주의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80년대 5월을 전후로 한 이런 의식상의 단층은 '80년대 초반기에 왜 그렇게 소설이 위축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시쟝르가 융성하게 되었나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 가져온 파장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방향성 같은 큰 문제로부터 한 개인의 문학관 같이 작고 내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위 [학림그룹]으로 불리는 황지우,이성복, 김정환 들이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했던 모교의 어느 단대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80년의 봄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패배였으며 엄청난 아픔이었다. 그 아픔은 자학을 낳았고 역사는 운명이라 불리웠다. 우리는 스스로를 객체화하고 흩어져 갔다.
--서울대 법대지[FILDES]시론,1984
이것은 물론 다분히 주관적인 발언이지만 당시 사회 일각의 정신적 풍토를 짐작케 한다. 한때 저마다 토론에 활발히 참여하며 스스로 역사발전의 주체세력이라 믿었던 지식인들은 이론과는 판이하게 전개되는 역사 앞에 경악했고 결국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이미 '위에서' 만들어진 지식소유자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좌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또다른 갈등과 이어졌다. 그것은 무력한 지식인 대신 상황극복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민중의 현실태가 민중의식이란 가능태에 비해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처럼 암울한 현실 앞에 시인들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기 작품의 준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딜레머에 빠졌다.
김정환을 비롯한 민중문학론의 계열처럼 '이 땅의 우매한 갈증, 우매한 사랑'에 대한 친화력으로 그 준거를 삼을 수 없었던 황지우는 자기 시의 진정성(sincérité)을 새로운 곳에서 찾았다.똑 같이 전위적인 새로움을 보여주는 다음 두 시에서 황지우의 시적 방향모색을 알아보자.
1)
… 1978년: [날 먼저 죽이고 나가라. 이놈아] 어머니 울면서 말리다 . 친동생 끝내 광화문으로 나가다. 통대 99% 지지같은 사람은 9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다. 홍표 나와서 컴퓨터 회사 취직하다. 출판사에, 수입 오펴상에, 섬유 수출업에, 하나씩 둘씩 들어가다. 더러 결혼도 하고 그런 때나 가끔 서로 얼굴 보다. 생(生) 지리멸렬해지다. 그런 생의 먼데서 여공들 해고되고 한 달에 한 번 대구로, 김해로 동생 면회가서 옷과 책 넣어주다.
1979년: 대통령 죽다.그리고 어느 날, 문득,멀리서,모두,한꺼번에 돌아 오다.
- <활엽수림에서> 끝 부분
2)
오늘 아침 버스를 타는데 뒤에서 두번째 오른쪽 좌석에 누군가 한 상 걸게 게워낸 자국이 질펀하게 깔여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서로 먼저 앉으려다 소스라치면서 달아났다. 거기에는, 밥알 55%, 김치찌꺼기15%, 콩나물 대가리 10%, 두부 알갱이 7%, 달걀 후라이 노른자위 흰자위 5%, 고추가루 5%, 기타 3% 순으로 천지신명이시여 이게 우리의 지상의 양식이랍니다. 퍼부어 주세요, 퍼먹여 주세요
- <버라이어티쇼 1984> 중에서
시인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역사적 에피소드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1)은 서사구조라는 비(非)시적인 요소가 오히려 시적 긴장(tention)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특이한 시이다. 그 이야기-서사구조가 제시하는 뒤틀린 삶의 단면 단면들이 일관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적절한 호흡을 맺어주고 있다. 유신하의 경직된 상황에서 이상과 우정의 이름으로 그물코처럼 자신의 삶을 얽어매던 의미들이 뿔뿔이 떠나감을 느낀 시적 화자에게 '79년의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2)는 1)에서 한꺼번에 돌아온 것처럼 느꼈던 삶의 의미들이 그 뒤의 상황전개 후에 어떻게 변모해 버렸는가를 연상작용을 통해 보여준다. 이 시의 대상, 즉 누군가 토해 놓은 오물은 시적 화자의 진술 속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f)을 일으키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걸게 게워낸 자국'으로 보이던 것이 '밥알 55% ' 같은 내용물의 분석을 통해 그 오물의 주인이 소시민임을, 그리고 이런 빈약한 안주로 과음을 해야했던 그의 아픔을 암시하고 끝에는 이 같은 아픔이 '우리의 지상의 양식'이라고 절규하는 것이다.
'이것도 시인가'하고 의아해할 1), 2)와 같은 양식파괴의 형태로 황지우는 상황이 규정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그는 다소 우회적인 효과를 통해 이 침묵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같은 상황하에서 민중에 대한 직설적인 친화력을 지식인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진실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 도피주의적인 지적 조작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세계의 불모성에 대한 황지우의 분노, 야유, 풍자가 현실극복의 전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맹렬한 비판들에 그런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지우의 시가 현실의 질곡과 한계를 반대한 몸부림만 보여줄 뿐 현실극복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없다는, 그래서 역사적 비관론에 빠져 있다는 비판들은 먼저 시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황지우의 입장과 변별되어야 할 것이다.
황지우의 시는 '시를 노래한다'는 식의 심미적 자율성에 대한 집착을 경멸하지만 일단 우리의 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시가 현실의 질곡과 한계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공적인 이데올로기와 또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하기에 시가 사회현실 속에서 하나하나의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 할 때에는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조장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거짓화해에 편입되는 것이며 '당연히 있어야 할 반대주장'이 되는 것이다.
황지우가 인식하는 시의 진정성은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에 끊임없이 반성의 계기를 지어주는 변증법적 긴장이다. 시는 이 진정성을 위해 '한 시대를 감시하는' 끝없는 질문의 형태, 끝없는 부정의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황지우는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왔지만 우리의 동시대와 맺어진 것은 악연입니다.
나는 물러날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그러나.
한 시대를 감시하겠다는 사람의 외로움의 질량과 가속도와 등거리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죄의식에 젖어 있는 시대, 혹은 죄의식도 없는 저 뻔뻔스러운 칼라 텔레비젼과 저 돈범벅인 프로야구와 저 피범벅인 프로권투와 저 땀범벅인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와 그리고 그때마다의 화환과 카프레이드 앞에
-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끝부분
우리는 이 시에서 황지우의 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는 양식파괴의 효과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시를 쓰는 자신의 행위가 풀려날 길 없는 '한 시대를 감시하는' 것인 이상 전통적인 시문법이니 음악이니 하는 문제는 그에게 무의미하다. "저 뻔뻔스러운 칼라 "에서 그가 가진 현실인식의 일단을 보거니와 황지우는 이 혐오스런 사회현실이 우리에게 가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억압을 드러내기 위해 기존의 사회가 규정하는 시적 정식을 넘어 새로운 전위적 형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황지우가 믿는 시적 진정성이다. 우리가 관습 속에 규정짓고 있는 시는 규정지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기존의 사회현실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시란 이런 것이다'를 규정하는 기존의 지적 권위는 혐오스런 현실의 체제와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당연히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알고 있는 장르의 계급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황지우의 믿음을 뒷받침한다. 서사문학이 봉건귀족사회의 한 전형이며 소설(Novel)이 근대 부르조아 계급의 지적 산물임을 밝혀낸 이론들은 모든 장르는 계급적 실존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요, 가사, 판소리의 고유한 전통에 외세와 함께 갑자기 등장한 우리의 시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존재하려는 황지우의 시가 기존의 시에 대해 반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황지우가 가진 부정적 현실인식이 장르의 계급성에 관한 인식을 매개로 시적 형식과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황지우의 시가 갖는 이같은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대응구조는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을까?
3. 별개의 것이 되기와 그 변모.
시는 해답이 아니라 질문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앞서의 논의들은 최근 황지우의 시에 대해 제기 되었던 많은 비판들을 되새기게 만든다. 특히 황지우의 시가 현실극복의 구체적인 전망을 던져주지 못한다는 민중문학쪽의 관점은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황지우가 지적조작의 시에 의해 성취하는 것이 단지 개인적 구원에 지나지 않음을 뜻한다. 개인적 구원은 가짜 구원이다. 사회전체의 구원이 없이 개인적 구원은 실제로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 )
결국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지금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며 지적 조작에 의한 문득 벗어남은 자기 기만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 성민엽, <시적 지성의 두 모습> (우리 세대의 문학2)
이러한 비판은 시가 삶에 대한 공동체적 문제의 해답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그러나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20년대 임화가 "문예비평에서 조선적 성격의 가장 중요한 점을 폐쇄된 정치비평, 사회비평의 한 개 방수로(放水路)"라는 데서 찾았듯이 사회 상황이 경직될 때마다 이같은 인식론상의 태도는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시가 정말로 사회적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만약 그럴 수가 없다면, 시는 그 시대 그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부정하고 질문할 뿐이라는 위의 인용에서처럼 '자기 기만적인 환상'으로 매도되고 있는 일련의 시들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바로 위의 평론이 인용했던 다음 두 시를 살펴보자.
1)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목숨입니다.
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 <에프킬라를 뿌리며> 전문
2)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끝부분
황지우의 제1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나오는 1) ,2)의 두 시들은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류하는 폐허적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이란 말은 정말 말 뿐이고 실제로는 모두가 파리목숨인 초토, 이것이 황지우가 보는 우리의 현실이다.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도, 거부의 '울음소리도 없는' 이 땅에 대한 절망이 그의 메시지로 파악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쉽게 말해 여기는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운운하는 이런 진부한 이야기가 어떻게 독자들의 눈에 강한 새로움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그가 형식파괴적 새로움이 갖는 독특한 진술방법, 즉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반추를 포기하고 과감히 별개의 것이 되기를 시도한 데에 있다. 그의 메시지는 작자 자신과 상황이 시적 화자로부터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반성적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라는 새로움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1)의 예에서 두드러진다. 시대의 총체적인 착취에 의해 비인간화된 우리가 파리에 비유된다. 여기는 초토라고, 파리는 파리목숨이라고 얘기하는 시적 화자는 분명히 파리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있다. 이 1행에서 4행까지의 진술이 시대의 억압에 아파하는 시인과 시적 화자가 동일시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시적 화자는 파리에게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을 포함한 우리에게 에프킬라를 뿌리는 것이다. 시적 화자를 세계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시인과 별개의 것으로 만드는 이 5,6행의 진술이 '우리는 파리목숨'이라는 식의 상투적인 냉소주의에 새로운 긴장을 집어넣고 있다.
2)의 예 역시 낭만적 아이러니를 통해 상황과 시적 화자가 별개의 것이 되고 있다. 이 시의 공간적인 배경은 영화관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그러나 그 배경이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우리의 관료주의 사회를 암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기존의 사회체제는 애국가 앞에서 기립한다는 체계적 장치를 통해서 전국민을 관료화하고 국민적 통합을 달성하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적 화자는 그 애국가의 영상 속에서 상황과 별개의 것이 되는데 그는 을숙도를 나는 새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세상을 떼어 메고 이 세상 밖으로 뜨기를 꿈꾸는 것이다.
폐허적 현실에 대해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자신의 현실인식을 새로운 질문의 형태로 제시하는 황지우의 시는 제2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로 옮겨오면서 더욱 깊이를 더해간다. 시인 자신의 모습이 {활엽수림에서}처럼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드러나던 제1시집과 대조하면 무엇보다 시속에 생활이 풍부해지고 자기 부정과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해 현실을 보는 그의 눈이 따뜻해지고 있다.
1)
나는 UHF방송을 즐겨 청취한다. 특히 '자연의 신비' 같은 프로에서 나는 알바트로스새가 어떻게 암컷 수컷을 찾고 교미하고, 새끼낳고, 겨울을 나고, 봄에는 마젤란해협으로 돌아오는가를 유심히 보았다.
일주일 전 그 집 대문 앞에 '조선일보 사절' 이 붙여져 있었는데. 오늘 아침 그집 대문 앞에는 '조선일보 절대사절'이라고 붙여져 있었다.
- <그들은 결혼한지 7년이나 되며> 중에서
2)
겁부터 난다. 나는 눈을 감고 가수(假睡)상태에 들어간다.
너 민중없는 민중주의자, 가짜! 냄새 나! 꺼져!
나는 왜 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적전에서 자꾸 뒤돌아보는가. 80년대는 막장이냐. 최전선이냐.
너 살아 넘어갈래, 죽어 돌아올래. 그렇지만
돌아보라 가장 현실적인 색은 탄색(炭色)이다. 그대 손은 묻어 있다.
- <박쥐> 중에서
제2시집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1)의 시는 시집 전체를 통해 보이는 황지우의 커다란 변모를 시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 '나'의 진술 속에 시인 자신이 두 개의 각기 다른 지각대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 '그'이며 또 하나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본 '알바트로스'이다. "그들은 결혼한지 7년이 되며 아들 제 771104-156282와 딸 제 790916-244137호가 있다"라는 시의 시작에서 보듯이 별개의 것이 된 시적 화자의 시각은 철저히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자기성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1)의 인용부분처럼 그 시각은 주관적인 쪽과 객관적인 쪽으로 번갈아 나타나면서 자기존재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다. 일찍이 보들레에르가 그의 시 {알바트로스}에서 현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움에 사는 시인의 운명을 지상에 떨어진 알바트로스새에 비유했던데 착안하여 티브이 브라운관에 나타난 "교미하고, 새끼낳고 겨울을 나는" 알바트로스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묘사하다가 다시 전혀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선일보 절대 사절'이라는 팻말을 얘기하며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같은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은 2)에 와서 극적인 자기부정과 반성으로 발전하다. 앞서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보여주고 부정하려했던 황지우에겐 이처럼 '적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적전에서 자꾸 뒤돌아보는' 자기반성(Selbstreflexion)의 과정이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현실에 적용했던 부정의 정신은 똑같은 논리로 자신의 민중적 세계관과 '위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존재가 일치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부정은 '너 살아 넘어갈래 ' 같은 희언(word fun)의 효과를 통해 자기비하나 자학에 빠지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색은 탄색' 이라는 인식을 낳는다. 바로 이것이 불모의 반대라는 표현아래 흔히 황지우와 같이 묶여지는 박남철과 다른 점이다.
각양각색의 형식파괴로 인해 치열하다 못해 차라리 전투적이었던 그의 부정정신은 "이제는 중산계급이 되어버린 즉 속악화된" ({상징도(象徵圖)찾기}) 자기 존재에 그 반성의 눈이 미치면서 세계에 실재하는 타자(Otherness)와 자아와의 근본적인 화해를 바라게 된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씌여진 그의 시들에게 이같은 인식의 변모가 보다 온건하고 절제된 시적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내 관절속으로
산 너머 먼 비가 오려고 할,
내 눈깔에 잔뜩 낀 먹구름
뒤안 대밭에 이는 소란한 부채소리
대숲 상단에 새로 돋는
불붙는 연초록
외치고 싶도록 눈부심
바람타는 숲 전체가 괴로움
이속에 집짓고 삶
- <담양> 전문
세계의 근본적인 화해를 바라는 그의 갈망은 "바람타는 숲 전체가 괴로움"이라는 포괄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담양대숲으로 상징되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시대상황의 부정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산너머 먼 비'가 오려 한다. 그러난 이것은 더 이상 별개의 것이 아니라 '내 눈깔에 잔득 낀 먹구름'인 것이다.
이렇듯 세계와의 유대와 화해를 갈망하는 시인의 인식변화를 고찰해보면 우리는 가장 최근의 시를 수록한 제2시집 후반부에서 왜 그의 양식파괴적인 전위성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황지우 시의 객관적 의의
지금까지 우리는 황지우의 시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관계를 이 시대의 사회상황에 대응하여 나타난 시적 진정성에 관한 그의 견해,그리고 '별개의 것이 되기'로 규정한 양식파괴적 새로움과 자기반성에 따른 그 변모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황지우의 작품들은 시가 해답이 아닌 철저한 부정정신을 통한 질문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의 형식을 탈피한 새로움을 보여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고, 또 이러한 태도로 인해 별개의 것이 됨으로써 얻어진 부정정신의 논리적 환기력이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 속에 심화됨에 따라 그 시적 형식이 변모해 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폐허적 현실인식과 별개의 것이 되기'에서 '자기 반성과 절제된 시적 형식'으로 귀결되는 황지우의 시세계는 현실인식과 시적 형식의 포괄적인 대응구조를 상정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리고 시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황지우의 시는 어떻게 가치평가 받아야 할 것인가? 이 같은 질문은 예술적 창조의 본질로부터 시적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양상을 철저히 분석하는 데서 그 답이 도출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여기서는 지면상 앞서 논의된 황지우의 시세계에 국한하게 되겠다.
시가 자아를 세계에 드러냄으로써 자아의 세계인식을 확인하고 질문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황지우의 경우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앞서 전제해야 할 것은 그 세계가 관념적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과 접맥되어 있어 항상 시적 자아와의 불일치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첫째 양상은 자아가 만나는 세계가 부정적으로 심지어 페허적으로 인식 될 때이다. 시인은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에 끊임없이 반성의 계기를 지어주는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경험적 현실세계를 부정하게 되고 이러한 부정의 부정은 의미없고 뒤틀린 기존의 세계가 규정한 시적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경험적 현실세계를 파괴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이같은 시인의 시도는 여러 가지 언어적 낯설게 하기(making strange)를 동원하게 되는데 풍자, 역설, 파격, 상황의 뒤틀림 등 황지우 형식파괴적 시들에 나타나는 모든 기교들이 그것이다.
둘째는 첫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부정의 부정(dir Negation der Ndgation)이 세계의 부정적인 모습을 "이제는 중산계급이 된, 속악화"한 상태로 내면화한 자기존재에까지 그 눈이 미치면서 치열한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의 내면세계를 갖추게 될 때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뒤틀리고 얽어매인 세계의 여러 타자들과의 근본적인 화해를 위해 자기식의 전망을 보다 일상적이고 절제된 형식을 통해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
이런 맥락에서 시의 진정성을 상정하고 그와 관련하여 황지우의 시를 가치평가하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1장 서두에서 인용했던 성민엽의 비판처럼 시는 사회적 구원과 개인적 구원 중의 어느 하나를 양자택일하고 그 하나를 첨예화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형상화를 통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의 경험적 리얼리티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정적이고 페허적인 현실의 폭력 속에 물화(物化)된 개인의 개성과 왜곡된 공동체적 삶은 시에 있어서 오로지 꾸준한 부정의 작업을 통해 지양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황지우는 시가 갖는 부정정신이라는 총체적인 본질을 통해 현실세계와 시적 형식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 질문은 80년대를 보는 그 나름의 현실 인식과 그에 대응하는 시적 형식 속에 단단한 의미망을 획득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 이 글을 맺으면서 한마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논의의 제측면이 황지우 시의 비밀을 밝혀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이 갖는 총체적인 의미는 어떠한 비평적 논점으로도 완벽히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해 온 이 논의도 그의 작품이 갖는 총체성에 비한다면 극히 미미한 것이며 단지 그 객관적인 의의의 일단을 밝히는 데 불과한 작업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황지우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려는 이유는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의 세계와는 또 다른 이 객관적인 논리의 세계가 '문학의 자리넓힘'이라는 입장에서 한가닥 의미있는 작업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세계와의 근본적인 화해를 갈망하게 된 황지우의 시가 아직까지 역사적 유대감의 전망은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땅의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문제제기와 성찰의 위해서는 이땅의 현실을 형성해 온 ' 이땅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부정과 극복의 정신들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세계와 시적 형식의 밀접한 대응구조를 띠고 전재되는 황지우의 문제의식이 '역사'와 ' 이 땅의 현실'과의 만남이 성취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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