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 안도현 시인 ( 시모음 )

풍경소리(양동진) 2011. 7. 17. 13:26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당선
1996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작품 : 안도현의 아침엽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연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짜장면

 

 

 안도현 시인 ( 시모음 )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가 우는 것이다.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게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연애 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양철 지붕에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말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말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때 쓰러질 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열심히 산다는 것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 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하고

백 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 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어제도 나는 강가에 나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시려나, 하고요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으로

눌러 두고

당신 계시는 쪽 하늘 바라보며

혼자 울었습니다


강물도 제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고

강가에 물자국만 남겨 놓고

흘러갔습니다


당신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강둑에 철마다 꽃이 피었다가 져도

나는 이별 때문에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란도란 열매가 맺히는 것을

해마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별은 풀잎 끝에 앉았다가 가는

물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운 것임을

당신을 기다리며 알았습니다


물에 비친 산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그 뻐꾸기 소리가 당신이었던가요


내 발끝을 마구 간질이던

그 잔물결들이 당신이었던가요

 

당신을 사랑했으나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오늘은 강가에 나가 쌀을 씻으며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 밥 한그릇 맛있게 자시는 거 보려고요

숟가락 위에 자반 고등어 한 점

올려 드리려고요

거 참 잘 먹었네,

그 말씀 한 마디 들으려고요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오래된 우물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분홍 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 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 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 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날, 살이 올랐다네.

 

 

 

찬밥

 

 

1970년대 편물점 단칸 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 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 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날, 살이 올랐다네.

 

 

먼산

 

 

저물녘

 

그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서쪽 산이 되지요

 

그대가 나를 감싸는 노을로 오리라 믿으면서요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숨기고

 

그대의 먼 산 되지요

 

 

 

낙동강

 

 

저물녘 나는 洛東江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때, 강은

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의 身熱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木船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 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銀魚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외로운 세상의 江岸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두 모여 흐르는

洛東江,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全琫準 )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당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혜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가을엔 이런 사랑을하고 싶다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봄날은 간다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아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자전거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출처 : 백합 정원
글쓴이 : li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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