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너와집 한 채

풍경소리(양동진) 2010. 11. 2. 09:59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서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시구연구

너와집 : 기와처럼 얇은 나무 조각으로 지붕을 올린 집. 시적화자의 지향을 상징하는 공간

저 골짜기 ~ 채워 넣고서 : 세상과 절연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사무친 ~ 못한 : 시적 화자가 너와집으로 오게 된 계기

나 어린 처녀 :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의 이미지

따라오는 ~ 지우겠네 : 세속으로 돌아갈 입구마저 지우겠다는 결연한 의지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구성

    1연 : 산간 오지인 ‘두천’으로 가고 싶음

    2연 : 두천에 가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은 소망

    3연 :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을 허물고 싶음

    4연 :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을 지워버림

제재 : 너와집

주제 : 세간의 고통을 초월하여 안식과 평화를 얻고자 함

 

김명인

시인. 1946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출항제' 당선. 1999년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5년 제13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2006년 제1회 이형기문학상. 대표작으로는 동두천 1, 바닷가의 장례, 베트남 1 등이 있음.

 

해설

흔하게도 인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우리는 흘러가면서 만난다. 사람과 붐비는 시장과 웃음과 꽃밭과 폭풍의 바다와 벼랑과 사막을 만난다. 그러므로 삶에는 여독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여행의 종착지를 생각한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적적한 곳으로 데려간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가서 살자고 한다. 종일을 살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개옻 그늘과 늦가을만이 살고 있는 곳. 세상의 쓸쓸함을 다 살아본 듯 벌써 무욕을 알고, 골짜기보다 더 깊은 눈으로 속리(俗離)한 우리를 맞아줄 여인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그런 곳이 있을까. 잇속이나 명리나 부귀 같은 것은 손을 털 듯 탁, 탁 털어버린 곳. 더 움켜쥐려는 근욕(根欲)이 사라져 알몸의 자아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 퇴폐도 맑게 씻기어서 별처럼 빛나는 곳. 삶을 탕진한 사람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마지막 성지(聖地). 그곳서 우리의 여행이 끝난다면 후회는 없으리니.


많은 독자들은 김명인(62) 시인의 첫 시집 '동두천(東豆川)'을 기억할 것이다. 기지촌에서 혼혈아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기의 경험을 쓴 동두천 연작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동두천 4')라고 써 수많은 독자를 여지없이 울먹이게 한 시!


김명인 시인은 동두천 연작 발표 후에도 지금까지 '욕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막막한 표랑을 강한 연민으로 감싸 안아온 시인이다. 그는 한국의 서정시가 실험과 해체와 생각의 과잉과 포즈의 유행을 탈 때에도 흔들림 없이 서정시를 지켜내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아 왔다. 그의 시에 대해 이승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마디로 김명인의 시는 마음이 놓인다"라고. 동감이다. [시인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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