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
호을아비
풍경소리(양동진)
2011. 10. 16. 12:41
호을아비
양 동 진
남루한 남자가 들어서는 구멍가게
홀아비 냄새 짙게 배인
찌들은 나잇살처럼
바랜 쥐색점퍼를 걸치고
잘살아 보자고 외치던 새마을 모자를 눌러쓰고
구부정한 걸음새로 다가온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눈은 강물처럼 깊었고
지팡이를 폴대처럼 끌고 다니며
빛바랜 가방은 가슴을 가로질러 꽁꽁 들러붙어 있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청춘의 상징은 이제
흔적만 남았다는 듯 과도하게 헐렁한 바짓가랑이
쭈글쭈글한 주머니에서 다시 꼬깃꼬깃한 지전을 꺼내들고
지나간 세월처럼 매운 신라면 사발을 산다
가장 단출한 식사를 원하는지
아니면 홀연히 지금이라도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손쉽게 물만 놓고 먹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발라면만 산다
생활의 여분은 없는지 달랑 한 개만을
다시 담배 하나를 주문한다
있지도 않은 옛 영광을 떠올리듯
올림픽이 떠오르는 88라이트를 달라며
너덜너덜한 소맷부리 속 손이
늙은 구렁이 개구리 삼키듯 슬그머니 나온다
끄트머리 잔돈을 치르고자
농협마크 선명한 누런 동전 지갑을 연다
또르르 굴러 떨어진 몇 개의 동그라미 소리에
고된 여정의 훈장처럼 굳은 허리를 접는다
모든 볼일을 보았다는 듯 묵묵한 표정으로
(안녕히 계세요) 도리어 인사를 하는
늙은 삭정이 같은 그가 까만 봉지에
신라면 큰 사발 달랑거리며 간다
단 하나의 매콤한 생처럼 라면 하나 매달고
또 하루를 그렇게 흘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