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복효근 시인 ( 시모음 )
복효근 시인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편운문학상」신인상 수상.
1997년 시와시학「젊은 시인상」수상
1993년 시집『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1996년『버마재비 사랑』
2000년『새에 대한 반성문 』
2002년『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2005년『목련꽃 브라자』
2006년『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시인 ( 시모음 )
비누에 대한 비유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넥타이를 매면서
넥타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본다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의지로 내가 나를 묶는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목을 꺾겠다는,
또한 누군가를 꼬여 넘기겠다는 의지 그래서 무엇을 그럴싸히
변명하겠다는 듯 넥타이는 달변의 긴 혓바닥을 닮았다
그것이 현란할수록 끌려가면서도 품위는 유지하겠다는 위장술,
혹은 저 밀림 속으로 누군가의 멱을 끌고 갔었던 따라서
진즉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자가 제 목을 감추는
보호색일지도 모른다 잘 보라
또한 넥타이는 올가미를 닮았다
그것이 양말이 아니라서 목에 두르는 것은 아니리라
마지막이듯 넥타이를 조이며 묶는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는가
헌신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외줄 위에서
허공이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각시 붓꽃을 위한 연가
각씨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씨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씨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씨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대신 매를 맞고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목련 후기
경배
누렇게 늙은 청둥호박을 땄다
명편
상처에 대하여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핀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