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구직 외 7 편/ 김기택
구직
김기택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썬그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되면 미련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정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싸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이깟 수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 <창작과비평> 2009. 가을호
막대기 속의 풍경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막대기 같은
길고 좁은 틈이 있다
길들, 푸른 나무들, 움직이는 것들은
그 투명한 막대기 속에 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줌마들 웃음소리, 엔진소리도
그 대롱 속에서 회오리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먼 산의 고요한 능선은 연필심처럼 짧아
언제나 직선이다.
아침이 되면
막대기에 형광등같이 희고 기다란 빛이 들어온다.
어둠도 눈도 비도 바람도
곧고 좁은 수직선 안에 끼여서 온다.
가끔 검은 막대기 끝에서 별이 뜨기도 한다.
-시집<껌> 2009. 창비
코뚜레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버렸으니!
코는
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부드러운 곳
붉은 혀만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깊은 구멍일 뿐인데
저렇게 단단하게 잠가둔 걸 보니 수상해.
그 구멍에서 가끔 뜨거운 공기가 나오고
신음소리도 나오고
희고 걸쭉한 분비물도 나오는걸 보니 더욱 수상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 없는 열쇠
열쇠구멍 없는 자물쇠를 열 유일한 열쇠, 도끼가
어느날 저 자물통을 부술 거야.
허나 도끼가 범할 일을 자세히 열거하고 싶진 않네,
저렇게 일평생 순결을 감금당하고도
도끼에 겁탈당할 죽음을,
겁탈당한 후에 다시 발가벗겨질 가죽과
그 속에 든 발갛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순결을.
-시집<껌> 2009. 창비
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으로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시집<소>. 2005 문학과지성사
귤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무도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앉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이 생기는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시집<소> 2005. 문학과지성사
버스
김기택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버스는 온몸에서 진저리 치는 소리를 냈다.
구슬픈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만 달리라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앞차와 부딪칠까봐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옆걸음으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게 되어 있는
동그란 다리,
속도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다리를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시 출발하면
옆 차선에 대가리를 들이대고 팍팍 끼어들면서
버스는 사납게 내달렸다.
기세등등한 엔진소리 사이로
숨어 우는 아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버스 앞유리는
깨질 것 같은 눈물이 가득한 눈
잠자리 눈처럼 얼굴을 다 가린 커다란 눈
눈꺼풀이 없어 감을 수도 없는 눈을 뜨고 있었다.
삼겹살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 차 있다.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치처럼 틀어막고 있다.
고개냄새를 성인(聖人)의 후광처럼 쓰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아직도 손잡이를 잡을 채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상쾌한 바람이 한꺼번에 고기냄새를 날려보낸다.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는 사이
고기냄새는 잠깐 파리떼처럼 날아올랐다가
바로 끈적끈적한 발을 내몸에 찰싹 붙인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어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 있는 내 몸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
- 시집<껌> 2009.창비
사랑의 동물병원
김기택
굳게 문이 닫힌 일요일
불 꺼진 ‘사랑의 동물병원’이 짖고 있다.
문틈으로 창틈으로
공기처럼 생긴 유리벽으로 컹컹컹
울음을 짖어대고 있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다
발자국 소리 속에 들어있을 것 같은 사람들에다
강아지를 잘 쓰다듬어 줄 것 같은 그들의 부드러운 손에다
제 울음을 찢어지도록 구겨 넣고 있다.
조그만 몸뚱이 안에 든 모든 동물성을
사각의 공기 안에서 사각이 되지 않으려고 날뛰는 동물성을
늑대의 피를 갖고서도 짖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동물성을
왜 날뛰는지 몰라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동물성을
몸 밖으로 다 꺼내려 하고 있다.
아무리 꺼내려 해도 꺼내지지 않는 맹수의 본능을 대신해서
울음이 하릴없이 유리창을 들이받고 있다.
벽을 들이받고 있다
간판에 예쁘게 프린트된 ‘사랑’을 들이받고 있다.
수없이 꼬리치면서 반겼던 주인들을 들이받고 있다.
부딪치다 떨어져도
콘크리트에 박히려다 튕겨 나온 못처럼 떨어져도
들이받는 것밖에 몰라 들이받고 있다.
짖는 소리에 제 사나운 이발을 달아서
광견병이 있을 것 같은 거품을 가득 묻혀서 들이받고 있다.
미용사가 깎고 빗겨 귀엽게 물결치는 귀와 꼬리와 하얀 털과
머리에 단 분홍 리본과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다는 충직하고 순수한 눈망울 속에서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 야수성을 다하여
귀여운 장난감이 되는 데만 조금 필요한 야수성을 다하여
꼬리치고 말 잘 듣는 야수성을 다하여
아무리 용을 써도 제 안에서 한 치도 빠져나올 수 없는 야수성을 다하여
아무도 없는 일요일을 들이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