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터미널/ 윤의섭

풍경소리(양동진) 2011. 8. 6. 10:50

터미널

 

윤의섭




직행버스는 서서히 터미널로 진입했다
가을걷이 끝난 황량한 들판에서 혼자 올라탄 버스 안에는
승객 서넛이 누런 저녁 햇살에 덮여 잠들어 있었다
내릴 곳은 이미 정해졌고 다만 도착 시간이 어긋날 뿐이었다
터미널에 정차한 수많은 노선의 버스는
차례를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조금은 긴장해 보인다
방금 내장을 비워낸 낡은 버스의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창틈으로 들려온다
승차 대기실에 켜놓은 텔레비전에선
연신 생명보험 가입 광고가 흘러나오고
매표소에 앉아있는 무료한 여직원은
소리구멍 뚫린 유리창 너머 쏟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바라본다
겨울로 가는 승차권이 저렇게 매진되고 있다
해남에서 진주에서 포항에서 속초에서
올라온 버스들이 터미널에 머리를 박고는 잠깐이나마 숨이 멎는다
먼 길을 떠나왔고 다시 먼 길을 떠나려면
쌓인 여로는 죽은 자의 기억인 듯 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태어난 곳을 다시 찾아오는 연어처럼 버스는 터미널로 간다
햇살 받으며 터미널에 줄지어 선 버스의 가지런한 등비늘
터미널은 품안에 들어온 모든 새끼들의 일생을 점지해 준다

출처 : 외출을 벗다
글쓴이 : 워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