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09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관계 1/ 유태안
[2009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관계 1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한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시>신춘문예 당선소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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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춘문예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한영서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착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이승훈(한양대 명예교수)·이영춘(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