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사평역에서

풍경소리(양동진) 2010. 10. 26. 20:22

사평역에서

                                         곽 재 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애상적, 감각적

표현 : ① 다양한 감각적 심상을 사용 ② 소멸과 떠돎의 이미지를 담은 시어 사용

제재 : 역(애환에 젖은 삶의 행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

주제: 삶의 애환에 대한 깨달음

  

  시구연구

막차 : 기다림의 대상.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 형성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유리창에 성애가 꽃처럼 서려 있는 모양

톱밥난로 : 대합실 안의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

그믐처럼 ~ 쿨럭이고 :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

그리웠던 순간들 ; 따뜻함의 이미지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동류의식

할 말 : 살아온 내력에 대한 이야기

청색의 손바닥 : 애환의 흔적들(차가운 이미지)

술에 취한 듯 : 맹목적인 삶

한 두름의 ~ 귀향하는 기분 :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않은 귀향

침묵해야 한다 : 어쩔 수 없는 현실 상징

오래 앓은 ~ 담배연기 :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

눈꽃 : 평화와 위로를 주는 존재

눈꽃의 화음 : 서정적이고 평온한 분위기 유발

단풍잎 같은 : 차창의 불빛을 비유

밤 열차 : 인생 역정을 비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미래에 대한 불안 의식이 엿보임

그리웠던 순간들 : 따뜻함이 있었던 시절(현실과 반대)

한줌의 눈물 : 서글픔과 연민의 정

 

  곽재구

1954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여 1992년 신동엽 창작기금과 1996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그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삶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내어 새롭게 일깨워 준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등과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장편동화 <아기 참새 찌꾸> 등이 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 봄부터는 순천대학교의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