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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벼루 / 마경덕

풍경소리(양동진) 2012. 3. 2. 21:32

벼루

 

   마경덕

 

 

 

뚜껑을 잃어버린 낡은 벼루

우묵한 가슴 하나만 남았다

 

족제비와 숫염소가 수없이 드나든 저 연지(硯池)

먹과 붓이 머리를 비비며 조금씩 덜어낸

벼루의 가슴이 앙상하다

열흘이 넘도록 마르지 않고

먹을 갈아도 흔들리지 않던 무게는

묵즙을 토해내며 점점 가벼워졌다

 

몇 개의 벼루를 뚫어야 명필이 되나

 

손바닥이 스쳤을 때

돌은 마음을 열고 칼을 받아들인 것이다

칼날이 돌에 매화를 앉히고 소나무를 세워 짝을 지어준 것인데,

가슴을 덮어줄 뚜껑은 어디로 갔을까

 

흰 구름이 되어 돌 위를 떠다닌 아름다운 문양도

다 묻어나가고 파인 가슴만 남았다

먹을 가는 소리를 삼키고

쏟아낸 묵서(墨書)의 흔적은 붓발에 말려 어디론가 흘러갔다

 

차가운 벼룻돌을 어루만지면

삼켰던 꼬리가 비백(飛白)으로 다시 솟을까

명을 다한 벼루가 날아갈 듯 가볍다

 

 

 

                               —반년간《님》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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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신발論』.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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