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해 겨울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방부제 같은 눈이 내리더니
고개 돌린 사이 물 되어 대지의 품으로 스며들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서둘러 떠나야 할 그 무슨 연유라도 있었는지
기억의 저장고에 누워 잠자고 있는
그해 겨울을 가져와 회색 도시에 눕힌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 위에
내려앉은 겨울 햇살은 눈을 부시게 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요와 적막 속에 묻힌
산골짝 집들은 벙어리가 된다
뒷동산의 소나무 눈의 무게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낸 후 쓰러지고
이에 놀라 웅크리고 있던 날짐승 외마디 비명이
첩첩산중 골짜기에 메아리를 남기며 푸드덕 날아가면
아버지와 삼촌은 가래를 들고 나가
어른들 키만큼 쌓인 눈을 치우시고
윗집 아랫집과 통할 수 있는 길을 내고
내일 새벽 소 여물을 끓일 수 있게 정지 밖에서 장작을 패신다
어느덧 겨울 햇살 서산에 걸려
처마 끝에 추위 몰리고
녹았던 고드름 다시 뼈를 세우려 할 때 부엌에선
엄마가 저녁 소 여물 끓이고 난 후
화로에 숯불 담으시고
눈 치우고 들어온 아버지는
화롯불에 꽁꽁 언 손 녹이며 청자 담배에 불을 붙이신다
엄마는 소 여물을 주고 난 후 저녁밥 짓기 위해
시커먼 무쇠솥 아궁이에 다시 장작불 지피시고
매운 연기 나가라고 삐끔히 열어 놓은 문으로 보이는 뒤란
간장독 된장독은 하얗고 두툼한 솜옷을 입은 것 같다
북쪽으로 난 굴뚝에서 힘없는 연기 꾸물꾸물 피어오르면
온 식구 모여 앉아 두리반 위 시래기 된장국에 코를 박고
흑백 TV에서 9시 뉴스가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시원한 동치미를 찾으시고
엄마가 양은대접에 담아온 동치미를 어슷어슷 아무렇게나 썰어
젓가락에 꾹 끼워 주면 그걸 하나씩 들고 먹던 가난한 겨울 밤
밖에선 버석버석 추위가 날을 세우고
김장독 묻은 헛간에 걸어둔 명태 겁에 질려 동태 되는 밤
문풍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과
붕 붕 울어 대는 부엉이 소리에 잠 설칠까 엄마는
두꺼운 솜이불 내려 우리 머리 위까지 덮어 주신다
아직 여명도 오지 않은 새벽
마구간 소 여물 끓이기 위해 엄마가
몸 일으켜 옷깃 여미며 스르륵 미닫이문 열고 나가시면
곧이어 새벽잠 없는 막내가 뒤따라 나가고
엄마가 아궁이에 감자며 고구마를 던져 넣고
아궁이 앞 모녀의 도란도란 소리에 겨울은 익어가고
탁탁 장작 타는 소리 희미하게 들리면
어느덧 여명은 동쪽으로 난 문을 통해
대지의 빛을 들여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