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그해 겨울

풍경소리(양동진) 2011. 12. 28. 20:31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방부제 같은 눈이 내리더니

고개 돌린 사이 물 되어 대지의 품으로 스며들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서둘러 떠나야 할 그 무슨 연유라도 있었는지

기억의 저장고에 누워 잠자고 있는 

그해 겨울을 가져와 회색 도시에 눕힌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 위에

내려앉은 겨울 햇살은 눈을 부시게 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요와 적막 속에 묻힌

산골짝 집들은 벙어리가 된다   

뒷동산의 소나무 눈의 무게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낸 후 쓰러지고
이에 놀라 웅크리고 있던 날짐승 외마디 비명이

첩첩산중 골짜기에 메아리를 남기며 푸드덕 날아가면

아버지와 삼촌은 가래를 들고 나가 
어른들 키만큼 쌓인 눈을 치우시고

윗집 아랫집과  통할 수 있는 길을 내고

내일 새벽 소 여물을 끓일 수 있게 정지 밖에서 장작을 패신다     

어느덧 겨울 햇살
서산에 걸려 

처마 끝에 추위 몰리고

녹았던 고드름 다시 뼈를 세우려 할 때 부엌에선

엄마가 저녁 소 여물 끓이고 난 후

화로에 숯불 담으시고  

눈 치우고 들어온 아버지는
화롯불에 꽁꽁 언 손 녹이며 청자 담배에 불을 붙이신다   

 

엄마는 소 여물을 주고 난 후 저녁밥 짓기 위해

시커먼 무쇠솥 아궁이에 다시 장작불 지피시고
매운 연기 나가라고 삐끔히 열어 놓은 문으로 보이는 뒤란

간장독  된장독은 하얗고 두툼한 솜옷을 입은 것 같다   

북쪽으로 난 굴뚝에서 힘없는 연기 꾸물꾸물 피어오르면
온 식구 모여 앉아 두리반 위 시래기 된장국에 코를 박고  
흑백 TV에서 9시 뉴스가 끝나갈 즈음 아버지가

시원한 동치미를 찾으시고   
엄마가 양은대접에 담아온 동치미를 어슷어슷 아무렇게나 썰어
젓가락에 꾹 끼워 주면 
 그걸 하나씩 들고 먹던 가난한 겨울 밤 

밖에선 버석버석 추위가 날을 세우고
김장독 묻은 헛간에 걸어둔 명태 겁에 질려 동태 되는 밤

문풍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과

붕 붕 울어 대는 부엉이 소리에 잠 설칠까 엄마는

두꺼운 솜이불 내려 우리 머리 위까지 덮어 주신다

     
아직 여명도 오지 않은 새벽
마구간 소 여물 끓이기 위해  엄마가

몸 일으켜 옷깃 여미며 스르륵 미닫이문 열고 나가시면

곧이어 새벽잠 없는 막내가 뒤따라 나가고   


엄마가 아궁이에 감자며 고구마를 던져 넣고
아궁이 앞 모녀의 도란도란 소리에  겨울은 익어가고 

탁탁 장작 타는 소리 희미하게 들리면
어느덧  여명은 동쪽으로 난 문을 통해

대지의 빛을 들여 보낸다   

 

  

 

 

 

 

 

 

      ♬~

 


출처 : 푸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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