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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김기택
풍경소리(양동진)
2011. 11. 26. 13:47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김기택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옆에서
텔레비전이 노래 불러대고 아빠가 전화기에 붙어 회사 일
을 한참 떠들어대도 아기의 잠은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다
치지 않는다. 어둠속에서 수액을 퍼올리는 뿌리와 같이,
잠은 고요하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아기는 간간이 이불을 걷어차거나, 깨어 울거나, 칭얼거
리며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래도 엄마는 젖을 주거나 쉬
를 누이지 않는다. 얼핏 깬 듯 보여도 실은 곤히 자고 있다
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몽유병자처럼 허깨비 몸은 움직이
지만, 잠은 한치도 흔들리거나 빈틈을 보이는 일이 없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
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
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
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저랗게 달게 자고 나니, 하룻밤에 이 세상 다 살아버리
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눈알들은 아침을
보고 잠시 휘둥그레지고 어리둥절해진다. 전생이 기억날
듯 말 듯 모든 것이 아주 낯선 모양이다. 그러다가 아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금방 친해져서 온몸으로 그 즐거
움을 참지 못한다.
출처 : 내혼에 불을 놓아
글쓴이 : e산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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